내 집 이야기

눈 오신 날 손주와...

소나무 01 2021. 1. 11. 10:49

크리스마스 선물로 축구화를 사 보내라던 손주 녀석은 그에 대한 답방(?)인 양 제 엄마와 함께 시골 할아버지 집을 찾아왔다. 답례 용품은 견과류 같은 것으로 제 엄마가 대신했지만 녀석 얼굴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는 행복한 연말이었다. 찾아온다는 전화에 눈 소식이 있는데 위험하니 내려오지 말라 하려다 이내 마음을 바꿨다. 눈이 오면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어 보는 그런 시골 추억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녀석이 내려 온 다음 날 예보대로 눈이 제법 내렸다. 지난겨울에 눈이 거의 없었으니 참 오랜만에 내린 눈이었다. 내 나이 즈음에는 눈을 치워 길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거리를 하나 얻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새하얀 세상을 대하면서 거기에서 이는 마음의 정화를 생각하는 반가움이 크다.  그러나 동심의 세계엔 여전히 눈사람이 먼저일 것이다.

마당을 하얗게 덮은 눈으로 제 엄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른 눈이라서 눈이 뭉쳐지지 않는다고 투덜댔지만 녀석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 보였다. 

 

 

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눈을 뭉쳐서는 나뭇가지 꺾어 눈썹 만들고, 빨간 남천 열매로 단추 만들고... 하여 눈사람이 만들어졌다.  내 눈엔 그저 어설프고 볼 품 없는 조형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녀석의 눈엔 귀엽고 다정한 친구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애착이 가는지 제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팔에 끼워주고, 엄마가 쓰고 있던 모자도 기꺼이 눈사람에게 씌워 준다. 좋아하는 대상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손주의 맑은 모습을 보며 난 그 앞에서 부끄러워했다. 세상살이 이해관계에 얽혀 닳고 닳아빠진 내 모습이 얼마나 사악하고 추한 것인지... 

 

 

녀석이 제 엄마와 함께 긴 겨울밤을 보낼 황토방에 군불을 지핀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예전의 불깡통을 돌리자고 하더니만 눈사람 만드느라 손도 시려워서인지 아궁이 앞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런 녀석을 위해 대신 불에 밤이나 고구마라도 구워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녀석이 떠난 다음에 일었다. 

 

 

 

며칠 후 눈은 더 내렸고 녀석은 이미 이곳에 없었다. 잠시라도 함께하던 사람이 떠나면 많이 허전한 법인데 하물며 허물없이 지내던 손자가 제 집으로 떠나 갔으니 더없이 집 안팎이 휑해졌다. 나는 녀석의 체취를 여전히 느끼며 녀석의 작은 흔적이라도 계속 남기고 싶어 눈밭에 녀석의 이름을 크게 쓰고 하트를 그려서는 카톡으로 날렸다.

그리고

돌아 온 녀석의 답신은.

 

 

 

 

                                                                                          - 2020. 12.3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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