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이야기

1.오십을 넘어 서며

소나무 01 2006. 8. 20. 16:30

 도시 안에 살면서 언제나 마음 안으로 그려오던 것은 산과 물이 있는 고즈넉한 곳에 내 집을 지어 꽃과 나무를 심고 텃밭을 가꾸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자신이 없었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이상만은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는 돌아 가야 할 곳, 그 곳은 산과 물이 품어안은 고향 땅 어느 곳, 그 안의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사람에게는 자연귀속본능이 있어 누구나 자연 그 안에서 살고 싶어 한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흔히 회자되는 복잡하고 삭막하고 비인간적이고... 그런 것들 때문에 대부분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결국은 한갖 꿈으로만 끝나버리고 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경제적이든 문화적인 문제이든 어떻든 각자의 사정에 따라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만다.

 평소 전원생활을 꿈꾸어 왔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을 꼭 이루고 싶었다. 감성적인 내 성향탓이기도 했으나 그런 성향을 만들어 준 어린시절 자연과의 어우러진 삶이 그리워서라도 다시 그 시절의 환경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의 어린시절은 산자락 언덕에서 멀리 푸른바다를 내려다 보며 지냈다. 바로 앞으로는 오동도가 손에 잡힐 듯 떠 있었고 그 뒤로는 남해섬(南海島)이 기다랗게 병풍을 치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바닷물에서 수영도 하고 갯지렁이를 잡아 낚시를 하고, 굴이나 우뭇가사리를 따고, 게와 해파리를 잡고, 그리고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지나 다니는 증기여객선 구경도 하고, 또 해안가 절벽에 피어나는 동백꽃도 해마다 보았다.

 집 주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무들과 할미꽃이 핀 뒷동산에서 나뒹굴기도 하고 커다란 무화과 나무에 올라 흰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덜익은 무화과를 따먹기도 하며 판자로 두른 울안에 토끼와 닭, 돼지같은 가축을 기르기도 했다. 겨울이면 구들장을 들인 방에 매일같이 장작불을 때며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다. 

 

 

 어릴 때 집 앞에서 찍은 사진. 아버지가 가꿔 놓은 꽃밭을 배경으로 옆 집 친구 경찬이와 찍었는데 친구 이름만 기억날 뿐 다른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50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사진의 나는 5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꽃을 좋아하신 아버지는 손바닥만한 땅이라 할지라도 비워두질 않았다. 봉숭아, 분꽃, 채송화, 나팔꽃, 영산홍, 키다리노랑꽃, 만수국, 백일홍, 다알리아, 풍접초, 상사화, 해당화, 작약, 모란, 한련, 양달개비, 국화, 참나리, 능소화, 장미, 사르비아,코스모스, 찔레, 앵두, 감, 포도, 탱자...  수많은 이름의 꽃과 나무들을 심고 가꾸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의 힘을 빌려 텃밭에 파와 마늘, 부추, 무우, 배추, 고추, 들깨, 가지,호박, 쑥갓, 참외, 옥수수, 사탕수수, 감자, 고구마 같은 것을 심었다.

 우리집은 농촌이나 산촌이 아니었지만 철도공무원인 아버지는 적당한 규모의 정원과 텃밭이 있는 관사에서 그렇게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사셨다. 늘상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성장하면서 자연히 그런 정서가 몸에 배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난 초등학교 1학년 때 까지는 바다가 있는 여수에서 보냈으나 아버지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보성 땅을 거쳐 최종적으로 익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그 곳에서 33년 동안의 철도공무원 생활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다.

 

 어느 새 세월이 흐르고,

 나는 어느 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주로 대도시에 생활기반을 마련하게 되면서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이유때문에 주로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땅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어질 수록 가능하면 아파트 가까이에서라도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되었고, 하여 지금 껏 산자락에 붙어있는 아파트에 눌러 살고 있다.

 삭막한 서울에서 바로 곁에서 땅밟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산자락에 일궈놓은 밭에는 그 옛날 고향집 주변에서 보았던 이런저런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고 나무들은 철따라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 가운데 언제나 변치않은 소망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당과 텃밭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질수록 울 안에 땅이있는 집이 그리웠고 정말 그런 곳 터를 잡고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때문에 한 해라도 빨리 아파트 생활을 탈출하고 싶었다. 

 

 지금 살고있는 집 앞의 숲으로 난 산책 길.

 

 산책 길 바로 옆으로 내가 좋아하는 잇꽃이 피어있다.

 

  어느 곳에다 그런 나의 꿈을 실현하면 좋을까.  정말 그럴 수는 있는 것일까.

 나이 오십이 넘어서면서 어떻게든 한 번 시작해 보자고 다짐해 보면서 시간이 될 때 마다 서울 인근, 비교적 교통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개발의 냄새가 덜나는 곳을 찾아다니기 터잡고 살만한 곳을 물색해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는 것 같은 양평이나 가평같은 지역은 피하고 지금 내가 살고있는 신림동에서 가까운 주로 화성과 당진 일대를 겨냥하여 돌아 다녔다. 그 곳은 고향 쪽과 조금이라도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갖고있는 여유 돈으로는 도무지 마음에 드는 터를 구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저 막연한 생각 뿐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언제나 마음 한쪽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서울 주변의 시골이 아니라 고향으로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 고향으로 가자. 고향은 언제나 날 포근하게 받아주지 않았는가.

  언제쯤이면 고향으로의 회귀가 가능할까. 생각해 보니 그 시기는 정년이란 이름으로 더 이상의 직장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나이, 만으로 58세가 되는 2010년 6월 이후가 되는 때, 그 때가 되면 아쉬움없이, 기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이곳 서울 땅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전에라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겠으나 보다 여유롭고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경제적인 축적이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세상사에 좌충우돌하며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흘러 갔고...

 

 그러던 2003년 1월 나는 회사 발령으로 인해 고향과 진배없는 전주로 근무지를 옮길 수 있는 호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겐 좋은 기회였다. 대략 2년 반 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시간이 될 때마다 인근의 산을 돌아 다니며 앞으로 내 삶의 터전이 될 땅도 함께 물색하며 다녔다.

 나는 한 때 퇴직 후 산촌에 들어 가 살겠노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얘기를  했었고 그 한 군데로 산깊고 물맑은 진안땅이 어떨까 싶은 생각을 가져 보기도 했다.

 그래서 진안지역을 타켓으로 하여 여러 곳을 물색하며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마뜩잖았다. 역시 마음에 차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말하자면 산천경개가 좋다 할지라도 문화적 수혜를 너무 기대하기 힘들거나 너무 사람들과 너무 떨어져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전원주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것 저것 주어 듣다보니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이 생기게 되었는데 가능하면 배산임수를 기본으로 하되 교통이 편리하고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편의시설이나 복지시설이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되었다. 주변에 민가가 적당히 형성되어 있어야 했고 노후의 경제적인 안정성을 감안해 환금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어 어느 한편으로 그 욕심을 포기하는 절제력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과 과정 속에서 최종 선택한 곳이 바로 내가 대부분의 세월을 보낸 익산 땅이었고 그 중에서도 전원생활의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미륵산 산자락이었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차분히 돌아 다니면 보다 좋은 여건의 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더 이상은 과욕인 것 같았다.

어떻든 내가 낙점을 하게 된 그 곳에서는 익산과 전주시 중심까지 30분 정도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미륵산 앞으로는 시원한 강물이나 맑은 냇물이 없었으나 제법 규모가 큰 금마저수지가 있는 것으로 가름할 수 있었다. 집터 뒤로 바로 산을 기대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의 풍광을 정원으로 끌어당길 수 있어 좋았으며 인근에 미륵사지, 보석박물관, 서동조각공원, 왕궁유물박물관, 왕궁온천 등이 있어서 여러가지로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미륵산은 여느 산처럼 방향에 따라 달라 보이나 사진은 동남쪽에서 바라 본 모습이며 사진 가운데 하얗게 보이는 약간 절개된 부분이 보이는 곳이 내 집터가 된다)

 

 나는 집터를 구하기 위해 부동산중개소를 찾아가 매물을 살펴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나면 그때 부동산중개업자를 찾아 가 중개를 부탁할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익산 금마면에 있는 군부대의 후문을 지나고 있었는데 미륵산 남동쪽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형태의 녹지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순간 바로 저 곳이다 라는 감이 왔다. 그 곳에 집을 앉히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그 일대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인지 다른 곳에 비해 그 곳만 사람 때가 묻지 않은 듯 정결하게 남아 있었다. 

 곧바로 궁금증을 풀어야 했지만 주변에 물어 볼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차를 몰고 면소재로 들어 가 딱 한군데 눈에 띄는 부동산업소에 불쑥 들어 갔다. 

 60대로 보이는 사람이 허름한 사무실을 지키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며 틈틈히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대충 위치를 설명해 주었으나 중개업자는 그 근처에는 나온 매물이 없었다는 듯 잘 모르겠으니 직접 가보자고 한다.

 

 내 차로 현장에 도착한 소개업자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매물로 나와있는 땅이긴 하나 진입로가 없어 평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땅이라는 것이었다. 도회지 같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손님을 구슬려 중개비를 챙기려들텐데 시골 사람답게 순박한 면이 있어 호감이 갔다. 내가 원하는 땅은 택지로 팔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평평하게 닦아 놓아 관심을 끌었다.

 그 곳은 남의 땅을 50m쯤 거쳐야 진입이 가능해서 사실 택지로는 불가한 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뭔가 대안이 있으니까 땅을 내놨을 터이고 보면 주인에게 의사 타진이나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저러나 이 땅이 무슨 개발제한지역 같은 무슨 그런 거 아니예요?"

"왜요, 집 다 지어요ㅡ "

"그런데 왜 이 근처에 집들이 없지? 내가 보기엔 좋은 땅인데. 전망 좋고- "

"그렇지 않아도 용안에 산다는 스님이 한번 왔다가긴 했어요. 터가 괜찮은 것 같아서 절을 지을까 한다고..."

용안은 인근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그 스님이 그랬다면 터가 좋은 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땅값이 어느 정도나 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대로 좋다는 이 근처의 땅은 평당 20만원 안팎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소개업자의 대답이 궁금했다. 소개업자는 생각보다 훨씬 싼 금액을 제시했다. 순진한 나는 귀가 번쩍 트였다.

(아니 그렇게 싸단 말인가-)

그래서 은근히 내 마음이 급해졌다.

"잘 좀 주선해 보세요. 그 정도면 괜찮네. 전망도 좋고-" 

역시 나는 그런 것엔 순진했다. 내 맘에 들더라도 뭔가 맘에 들지 않다는 듯 어수룩하게 행세해야 하는대도 말이다.

 나는 내심 흐뭇해 하며 그 스님이 다시 찾아 오기 전에 내가 먼저 땅을 구입해야겠다고 벼르기 시작했다.

어떻든 소개업자는 주선해 보겠다고 하며 내가 선호하는 땅이 어떤 곳인지 대충알겠다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몇군데 매물을 한번 살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혹 더 좋은 곳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 흔쾌히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가 소개해 준 서 너곳 그 모든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용하긴 하나 앞이 막혔다거나 너무 개방되어있는 그런 곳이었다. 결국은 내가 원하는 곳을 구입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여 거래행위는 급물살을 탔다. 구입한 땅의 면적은 총 6백53평, 그래도 상당한 액수의 땅값을 지불해야 했다.

 계약을 위해 토지소유주를 만났다. 중년의 부인이였다. 땅값 깎아달라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주위에 집들이 없는데 혹시 내놓은 땅이 문화재보호구역은 아니냐는 것부터 물었다. 중개업자가 집을 지을 수 있다고 했지만 주인에게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불과 1Km 남짓의 직선거리에 유명한 동양최대라는 미륵사지 석탑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익산 미륵사지. 동양 최고(最古)의 미륵사지 서탑은 현재 해체 복원공사 중이며 사진의 탑은 같은 규모로 복원된 동탑이다. 

 

"아니예요. 관리지역이예요. 여기는 문화재보호구역이 될 수 없는 곳이거든요. 집을 지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녀는 저 앞으로 보이는 언덕에 봄이면 연분홍의 복사꽃이 무릉도원처럼 피어 전망이 참 좋은 곳이라며 팔기 아깝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지금은 시기적으로 가을에 가깝지만 나도 그런 모습을 상상해 보며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다 좋은데 진입로를 확보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인접한 땅이 자신의 땅이니 어떤 형태로든 길을 내어 줄 것이라며 염려말라는 대답이었다. 진입로에 대해서는  평소 주워들은 얘기가 있어 그것 만은 확실히 해야했다.

 결국 익산에 있는 법무사무소에 함께 가서 진입로를 확보해 준다는 단서를 계약서에 명기하고 계약금을 건냈다. 이 대목에 대해서 내가 조금 아는 체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진입로 부분을 그 때 보다 확실히 명기했어야 했다. 정확한 위치나 면적 등에 대해 명기해야 했으나  길을 내 준다는 약간 모호한 표현에 만족해 버렸다.

 문서를 작성한 법무사를 신뢰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러나 막상 집을 지으려했을 때 이 진입로문제 때문에 결국 땅주인과 실랑이를 벌이며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이 잘 해결될 수 있었지만 어떻든 그런 문제를 예상해서라도 문서는 정확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나로서는 좋은 경험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중요한 사안은 평소의 인간 관계만을 생각하며 말로만 약속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효력이 있는 문서로 명문화시켜 놓아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땅은 내 마음에 들었다. 평소 소원해 마지 않던 내 땅이라는 것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랐다. 그 땅안에 상상의 내 집을 짓곤 하면서 혼자 좋아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내는 내 마음을 너무 잘아는 터라 내가 보기에 좋으면 알아서 구입하라고 필요한 돈을 보냈다. 아내와는 서울에 살면서 충남 당진 일대를 함께 돌아다닌 일이 있어 내가 어떤 땅을 원하는지 아내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당진군 정미면에 있는 수리한 농가를 포함해 산자락 밑에 있는1,000여평의 땅을 구경한 일이 있었는데 그 곳이 어느정도 마음에 이끌렸으나 결정적으로 서향이어서 포기해 버린 일도 있었다.

 당진은 서울 내 집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1시간 안에 진입이 가능한데다 다른 지역처럼 요란한 음식점이나 러브호텔같은 볼상 사나운 모습이 없어 좋았다. 이를테면 그런대로 청정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귀소본능이란 게 참 대단한 것이었다. 어디를 둘러 보더라도 언제나 고향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내 땅을 소유하게 만들어 준 등기필증)

 

 익산의 미륵산 자락에 마련한 땅. 난 계약이 된 서류와 소유자 이전이 완료된 등기권리증을 몇번 씩이나 들여다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생각같아서는 그 곳에 당장 집을 짓고 전주의 아파트 사택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으나 마음 뿐이었다.

 당장 집을 지을 수있는 재력도 없었지만 발령이라도 나서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으로서 그동안의 나의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 같았다. 

 구입한 땅에 집이 없었지만 주말처럼 시간이 될 때마다 그 곳을 찾았다. 그런데 자세히 둘러보니 600평정도의 너른 땅은 일부가 경사면인데다 또 일부는 배수로로 쓰이고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500평 정도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터의 위치가 맘에 들었기에 그 모든 불만족스러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2차선의 포장된 간선도로에서 내 터로 들어가는 비포장 도로. 나는 이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 맨흙이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동산 소개업자로 부터 연락이 왔다. 또 땅을 사라는 것이었다. 전혀 생각치 않았던 일이었는데 그런 제의를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땅이 바로 얼마 전 구입한 내 땅과 붙어있는 바로 뒤의 임야였기 때문이었다.  내 땅의 바로 뒷편으로는 미륵산과 연결이 되는데 그게 사유지인지를 몰랐다. 미륵산 자락이기에 그냥 국유지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지로는 사유지이고 보니 어느 날 내 집 뒤로 엉뚱한 용도의 건물이 들어선다거나 하게되면 일부러 좋은 위치를 선택하고자 했던 그동안의 노력이 허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서서히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부동산중개업소에 내 놓은 임야에는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자귀나무가 있었고 우람한 소나무도 여러 그루가 있어 더욱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망서리지 않고 750평 정도가 되는 그 땅을 계약해 버렸다. 내가 배웠던 경제용어 가운데 잉여효과란 말이 있었듯 시가보다 비싸게 지불하더라도 스스로는 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어수룩함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흥정을 벌였으면 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곳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 때문에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또 그렇게 혼자서 판단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내가 절약생활을 하며 애지중지 모아놓은 억대가 넘는 돈을 일순간에 탕진(?)해 버리게 되었다. 아내에게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교차하였다. 정말로 입을 것 먹을 것 제대로 욕심부리지 않고 꾸준히 저축해 온 돈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겨울에 여름구두를 신어야 했고 구멍 난 내의를 스스럼없이 입고 다니면서도 맑은 웃음 짓고 다니던 아내가 알뜰하게 모아놓은 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땅에 대한 소유욕과 집에 대한 집착때문에 그리고 내 맘에 드는 좋은 땅을 내가 망서리는 동안 행여 다른 사람이 매입해 버리지 않을까하는 순진함과 소심함으로 인해 매입절차를 일사천리로 끝내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성급했고 또 너무 과하게 지급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평소 그려오던 집과 꽃과 나무들을 그 땅에 설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아쉽고 서운한 감정들은 쉽게 잊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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