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이야기

2. 그 땅으로 돌아가다

소나무 01 2006. 9. 14. 11:43

 나에게 땅이 생겼다는 것은 정말 기쁘고 신나는 일이었다.

1차로 구입한 650평 정도의 땅은 원소유주가 택지로 조성해 놓은 탓에 평평하게 닦여 있었지만 최근 2-3년 동안 방치해 둔 탓인지 키작은 아카시아와 잡초가 무성하였다. 특히 번식력이 왕성한 자리공 군락이 무섭게 자라고 있어 동쪽 한 방향으로는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산자락과 접한 내 땅은 앞으로 보이는 시원한 들녘보다 조금 높게 위치해 있어 앞쪽으로의 경계면이 석축으로 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석축 밑으로 작은 수로가 나 있었는데 위쪽의 미륵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였다. 이 수로에 항상 맑은 물이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만 산이 깊지 못하다 보니 갈수기에는 항상 말라 있는 편이고 비가 내린 후 며칠동안만 물이 흘러 산촌다운 느낌을 줄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좋았다.  나중에 집을 짓게 되면 넓은 마당에 초록의 잔디를 깔고 경사진 석축에는 군데 군데 철쭉이나 장미같은 것을 심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수로를 따라 걸으며 혹 개구리알 같은 것이 없는지 살펴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얼마 후 2차로 구입한 땅은 임야라는 지목답게 경사진 터에 나무가 무성하였다. 내 나이보다 오래되었을 것 같은 소나무가 여러 그루였고 옻나무, 생강나무, 팽나무, 신갈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복숭아나무, 쥐똥나무 등 그런대로 다양한 수종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2차로 구입한 땅에는 여러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임야였다. 그 중 200평 정도는 산소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평평하게 닦아 놓아 집을 앉혀도 좋을 만큼 조망이 좋았으나 뒤가 터져있어 아쉬웠다.

 무단 산지 전용이라는 고발이 있었던지 토지소유주는 그 곳에 향나무와 철쭉을 심어 원상복구하려는 참이었다)

 

 많은 나무들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30년 쯤 되었을 것 같은 자귀나무였다. 마치 공작새의 깃털이 살짜기 내려앉은 것 같은 연분홍의 자귀나무꽃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평소 좋아했고 밤이면 마주 난 나뭇잎이 오므라들어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에 금실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합환수(合歡樹)로 알려져 있는 나무여서 특별히 시선을 끌었다.

 효용가치가 없는 나무들을 나중에 간벌해 내고 적절한 관상수나 유실수를 안배해 심으면 좋은 나무 정원으로 가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이 사이에 그럴만한 야생화를 심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 날 꽃을 피운 자귀나무, 또 다시 구입한 토지에는 30년 쯤 되는 자귀나무가 자생하고 있어서 특별히 나의 마음을 끌었다)

 

   실지로 전원주택에 살아 본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주택지가 200평 정도 넘으면 관리 한계를 벗어 나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하고 버려두게 된다고 한다. 특히 직장을 별도로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제초작업이나 채소재배 등에 있어 혼자 힘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럴듯한 밭을 한나절이면 쉽게 꾸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막상 삽을 들어 봤으나 어찌나 힘에 부치던지 손바닥 만한 고추밭도 제대로 일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욕심을 부려 1,350평이나 되는 토지를 구입했으니 아무래도 과욕인 것 같았다.

 

 이듬 해 봄, 나무심기에 좋은 시기가 찾아 왔다. 땅이 생겼으니 나무를 심어야 했다. 전주 인근의 나무시장을 찾아 주로 과수 위주의 묘목을 구입했다. 한번 심어놓고 나면 잊어버릴 요량으로 값싼 1-2년생 묘목으로 골랐다. 배나무, 사과나무, 자두나무, 호두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등을 비롯해서 왕방울은행나무 등등 하여 20 여 주를 구입해서 심었다. 휴일을 택해 적당히 심어봤는데 주인의 여린 마음을 생각해서 인지 모두 뿌리를 내려 얼마 후 잎이 나왔다.

 "오-, 새잎이 나오다니...  "

 아마 그런 맛에 흙과 함께 살기 원할 것이다. 그래서 몇년의 세월이 지나 나무가 훌쩍 자라 나무 마다에 열매가 달려있는 것을 상상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나무를 심고 난 후에는 밭을 만들어야 했다. 삽과 호미, 톱, 낫 등의 농기구를 구해 차의 트렁크에 싣고 다니며 잡초더미들을 걷어 내고 밭을 꾸미기 시작했다. 순전히 호기심 하나로 덤벼 들었다.

 우선 전주 모래내 시장에서 고추와 상추, 호박의 3가지 모종을 구입해 심었고 모악산 자락에 농막을 마련해 살고있는 같은 성향을 가진 직원으로 부터 옥수수모를 얻어다 심었다. 씨앗을 직접 뿌리지는 못했지만 내가 땅을 일궈 채소를 재배한다는 것이 정말 기쁘고 신나는 일이었다.

 

 (시장에서 구입해 심은 고추와 상추 모종. 낮은 앵글로 찍어 밭이 넓어 보이나 사실은 불과 두 세 평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 물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는데도 상추는 잘 자라 주었고, 그래서 주말에 내려 온 아내와 함께 상추 잎을 따 쌈거리를 준비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랫만에 해 보는 삽질은 많이 힘들었다. 얼굴에 땀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그래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멀리 떨어진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꿈결인 듯 가까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왔다. 대화의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으나 너무나 정겹게 들리는 것이었다. 뻐꾸기 한 마리가 찾아 와 뻐꾹, 뻐꾹 하며 마치 친구처럼 벗해 준다. 따듯한 봄햇살과 함께 하는 전원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그래 이 땅을 사길 잘했어. 진즉 이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

내 마음은 어느 때 보다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매일 출근해야 하는 직장일 때문에 날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풀을 뽑아주고 하는 관리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인근 전주에서 금요일까지 바쁘게 보내다가 일주일 뒤에 찾아 가 보면 고추 모가 쑥쑥 자라 있어 기뻤지만 아무래도 생기가 없어 보였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인이 없으면 더욱 기세를 부리는 것 같은 자리공이나 아카시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제거했으나 이놈들의 번식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뿌리를 파서 제거하지 않는 한 일주일에 한번 씩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특히 자리공이란 놈은 다년생 풀이어서 뿌리가 깊히 박힌데다가 뿌리 크기도 고구마만큼 이나 커서 제거하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싹이 올라올 때마다 낫으로 사정없이 쳐 냈지만 일주일 후에 가 보면 그런 나의 노력을 비웃기나 하듯 다시 싹이 한  뼘 씩 자라 있었고 2주일 정도 후에 가 보면 약간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왕성하게 잎과 줄기가 뻗어 있어 여간 짜증스러운 게 아니었다. 산딸기와 다른 잡초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풀과의 싸움에서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의 내 형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추와 상추밭 안팎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는 그런 정도의 일 뿐이었다. 그 옆에서 무섭게 자라는 잡초들을 바라보며 그저

"네 이놈들 어디 두고보자. 내가 여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살게 되면 그 땐 그냥 요절을 내 버릴 테다"

속마음으로만 그렇게 벼를 따름이었다.

무성한 산딸기는 가시가 많아 그 사이로 걸어 다니기가 쉽지 않았지만 대신 빨간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렸다. 그냥 내버려두기가 너무 아까워 제법 많은 양을 따서는 술을 담궈 저녁 밥상에서 한잔 씩 따라 마시며 당시 일을 회상해 보곤 한다.

 

 내가 원하던 토지를 구입해서 그렇게 생활하던  어느 날 나는 회사 발령으로 인하여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 때가 2006년 4월 14일, 그러다 보니 전주에서 서울로 돌아 온 후로 1년 반 동안은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어 구입 당시의 유휴지로 방치해 둘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 살면서 왕복 6시간 정도의 거리를 오가며 나무와 채소를 가꿀 수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산행을 하거나 TV나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전원생활 모습을 접하다 보면 나도 저런 채소와 나무를 심고 가꿀 수 있는 땅이 있는데 ... 하면서 아쉬워 할 따름이었다.

 지금이라도 그 땅에 집을 지으면 어거지로 라도 자주 오가면서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공상만 해 보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이미 그런 계획이 서 있었지만 아내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었다. 전원생활이란 게 겉으로는 낭만적이고 목가적이어서 좋을 듯 싶으나 실지로 손에 흙 묻히고 살다 보면 주변에 말붙일 만한 변변한 사람이 없거나 시장보기가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도시생할이 편리함이 그리워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는 채소나 꽃을 가꾸는 것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럴 경우가 되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평소에 보여준 바 있어 다행이었다. 결정적으로는 내가 2005년 11월에 출간한 산행산문집에서 고향 산자락에 마련해 놓은 내 땅에 집을 짓고 아내와 함께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던 게 아내의 마음을 많이 움직이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귀향과 관련한 계획들이 생각보다 이르게 급물살을 타며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아내는 그 사이 다시 열심히 저축하여 이번에는 집을 지을 수 있는 돈을 만들어서 나의 희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실 그러한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전원생활에 대한 나의 꿈은 한갖 꿈으로만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내의 그러한 희생과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말하자면 의식주에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평소 씀씀이를 줄이고 그야말로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하면서 마련한 돈이기에 더욱 돋보이고 가치있는 것이었다.

 우리 내외가 본디 이재에 밝지 못해 부동산 투기와 같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모은 게 아니라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 주지 않고 성실히 살면서 그저 꾸역 꾸역 저축해 온 돈이기에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가치있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내가 집을 짓는다는 것이 주변에 조금씩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 (한 자리하더니만) 돈을 많이 번 모양이구먼-" 하며 어떤 부정한 방법으로의 부의 축적을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 내외는 그저 회사에서 주는 월급만으로 살아 온 전형적인 샐러리맨들의 생활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면서도 봉급의 최소액수라 할지라도 일정부분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았고 한편으로는 돈을 모아보겠다고 하여 사람들과의 식사 때에 뒤에서 꿈지럭거리며 구두끈을 매는 조금 치사한 매너를 보이지 않았다. 제 몸부터 사리는 깍정이같은 모습들을 보면 내가 보기에도 어딘가 사악하고 추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택시보다는 언제나 버스나 지하철이었고 구차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오래된 옷을 입고 다녔으며 집안의 가전제품이나 가재도구들도 대부분 오랫동안 사용하며 신제품으로 쉽게 바꾸지 않는 절약생활을 했다. 물건이 많은 집은 물건이 돋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물건보다 사람이 돋보인다는 말을 곱씹으며 나름대로는 검소하게 살아 온 편이었다.

 

 얘기가 잠시 새어 나갔지만 어떻든 우리가 소망하는 집을 그 곳 미륵산 산자락에 지어 보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가구 2주택 문제였다. 현행법으로 1가구 2주택의 경우는 한 집을 처분할 때 50%라는 고율의 의 양도소득세를 물어야한다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에서 살고있는 아파트를 처분할 수는 없었다. 정년까지 4년 남짓 남은 기간동안 서울 생활을 해야만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의 생활 근거지도 계속 서울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골에 집을 짓기 위해 현재의 아파트를 팔고 남의 집에 전세로 들어가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비록 한 때 달동네라고 불리웠던 서울 변두리 지역에 살고 있긴하나 어떻든 아파트는 매년 조금씩이라도 값이 상승하는 재산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던 중 집값이 3억원이 넘지 않은 광역시 이외의 지역에 소재한 주택은 1가구 2주택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내가 돈벌이를 위해 투기용으로 집을 두 채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의 고향 익산 땅에 진정한 나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알게되었지만 광역시 이외의 경우라 할지라도 건물의 가격과 면적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상응한 과세를 적용하고 있었다) 건축상 현행법과의 관계, 다른 형태로의 재산증식 방법등 이것 저것 따지다 보면 집에 대한 나의 꿈이 언제 실현될 수 있을 지 알 수 없어 전원생활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여 어느 정도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는 지금 시점에서 일을 벌이는 게 현명하다 싶었다.

 

 그리하여 결국 2006년 3월 초, 드디어는 익산의 미륵산 아래에 집을 짓기로 최종 결정하여 시행에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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